
작성일 : 2026-01-16 17:04

장용기 사회복지학 박사 = 차가운 규칙 위에 양심을 얹는 사회를 향한 지역의 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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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용기 사회복지학 박사 |
2026년 대한민국, 우리 사회의 화두는 여전히 ‘공정’과 ‘정의’다. 그러나 그 실체를 들여다보면 차가운 법전과 뜨거운 양심이 사정없이 충돌하는 현장을 마주하게 된다. 필자는 이 갈등의 본질을 두 단어로 정의하고자 한다. 바로 내 안의 나침반인 ‘모랄(Moral·양심도덕)’과 사회의 신호등인 ‘에틱(Ethic·규칙윤리)’이다.
흔히 이 둘을 혼용하지만 그 결은 판이하다. 모랄은 누가 보지 않아도 스스로 느끼는 부끄러움이자 인간의 내면적 ‘양심’이다. 반면 에틱은 조직과 사회가 합의한 객관적 행동 지침, 즉 집단의 ‘규칙’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에틱’이라는 이름의 칼날이 ‘모랄’이라는 인간적 가치를 사정없이 베어버리는 기계적 정의에 매몰되어 있다. 과거 2,400원의 버스비 미입금을 이유로 17년 경력의 기사를 해고한 판결이 대표적이다. 법관은 법적 안정성과 규칙(에틱)을 수호했다고 강변하겠지만, 그 서슬 퍼런 판결문 어디에 한 인간의 생존권과 고단한 삶을 살피는 양심(모랄)의 온기가 있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소설 《레 미제라블》의 자베르 형사는 오직 ‘법전(에틱)’만이 정의라고 믿었다. 하지만 자신을 살려준 장발장의 숭고한 양심(모랄)을 마주한 순간, 그의 차가운 세계는 붕괴했다. 규칙이 양심을 품지 못할 때, 정의는 한낱 ‘기계적 폭력’으로 전락한다는 사실을 그는 죽음으로 증명했다.
조선중기 기인(奇人)이자 성현이었던 토정 이지함 선생은 아산현감시절 일종의 구휼 기관인 ‘가난한 이들의 집(걸인청)’을 세워 헐벗은 이들을 보듬었다. 선생은 유교적 예법(에틱)이라는 형식에 매몰되지 않고 배고픈 백성을 살리는 실천적 자애(모랄)를 최우선으로 삼았다. 선생에게 규칙이란 백성의 고통을 더는 도구였을 뿐, 결코 사람 위에 군림하는 칼날이 아니었다.
우리의 ‘우리(We)’ 정서 또한 성찰이 필요하다. 한국인의 ‘우리’ 안에는 이웃을 보듬는 따뜻한 모랄이 살아있지만, 때로는 집단 이익을 위해 개인의 양심을 억압하는 비겁한 에틱으로 변질되기도 한다. 반대로 서구의 ‘나(I)’ 문화가 강조하는 권리라는 에틱 역시, 타인에 대한 배려라는 보편적 모랄을 잃으면 결국 독선적인 이기주의로 흐를 뿐이다.
명확한 사실은 하나다. 에틱(규칙윤리)은 모랄(양심도덕)이라는 뿌리에서 영양분을 먹고 피어난 꽃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뿌리가 썩은 꽃은 아무리 화려해도 금세 시든다. 법전이 아무리 촘촘하고 매뉴얼이 완벽해도, 그 안에 ‘사람에 대한 예의’라는 양심이 흐르지 않는다면 그 공동체는 이미 생명력을 잃은 것과 다름없다.
장발장은 법을 어겼으나 양심을 지꼈고, 자베르는 법을 지켰으나 양심을 잃었다. 2026년 우리가 지향해야 할 좌표는 분명하다. 차가운 규칙(에틱)이 따뜻한 양심(모랄)을 수호하는 사회, 신호등이 나침반의 방향을 거스르지 않는 상식적인 나라다.
‘힘을 쓰면 편안해진다’는 이름을 가진 우리 무안(務安)에서부터 그 길을 열어가면 어떨까. 무안이 앞장서서 토정선생의 애민 정신을 이어받아 에틱의 칼날 같은 신호등과 모랄의 따뜻한 나침반을 조화롭게 세우는 데 힘을 쏟는다면, 우리 사회의 갈등은 비로소 안식을 찾을 것이다. 규칙의 엄정함이 양심의 온기를 지켜주는 무안의 저력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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